От Ильича до Ильич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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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卿博士
記一. 이 글은 방명록을 겸합니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는 분께서는 이 글 밑에 공개(혹은 비공개) 글로 남겨주시면 됩니다. 옛 방명록은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記二. 링크는 자유롭게 하셔도 좋습니다. (저는 강제할 수 없는 규칙을 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記三. 글을 안 쓰니까 아예 들어오게 되질 않아서 습관을 바꿔 보려고 합니다. 별것 아닌 거라도 좀 쓰면서 들여다보는 습관을 다시 붙이는 쪽으로. (2013년 1월 21일 추가)

떠든 사람: 이재율
by sonnet | 2018/11/05 13:32 | 블로그/일상 | 트랙백 | 덧글(53)
웃음의 귀결

의무적 웃음에 얽힌 우화

1990년대 후반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식료품 체인인 세이프웨이는 고객 개개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른바 ‘친구 같은 서비스’로 유명했다. 고객 서비스에 관한 한 1위가 되어야겠다는 목표 아래 세이프웨이의 경영진들은 15만 명에 이르는 전 직원이 고객을 친구처럼 대하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1993년 세이프웨이는 더 나은 서비스 프로그램 아래서 훨씬 더 공격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이 캠페인을 통해 직원들은 어떤 특정한 행동을 보이도록 훈련되었다. 그들은 고객의 요구를 예상하고, 제안해야 했으며, 고객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심지어 고객의 바구니조차 들도록 강요받았다. 그들은 언제나 웃어야 했으며 고객들과 눈을 맞추면서 서비스하도록 교육받았다.


웃어라! 그렇지 않으면 해고다

1998년 세이프웨이는 서비스 정책을 한층 강화했다. 이를 위해 ‘정체불명 쇼핑객’이라는 비밀 쇼핑객을 이용했다. 이것은 각 매장의 직원들이 행동 규정에 맞게 근무를 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 것이었다. 정체불명 쇼핑객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선출했으며 이들의 임무는 직원들의 행동강령 준수도를 채점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직원의 행동 하나하나를 살펴보았다. 직원들이 먼저 고객과 눈을 마주치는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으로 맞이하는지, 고객의 요구사항을 미리 간파하고 도움을 주는지,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고객의 이름을 불러주는지 등을 체크했다. 그리고 채점 결과는 매번 직원 휴게실에 게시되었다.

평균 이하의 점수를 받은 직원들은 재교육, 경위서 등을 써야 했으며, 심한 경우에는 해고를 당하기도 했다. 다섯 명의 정체불명 쇼핑객 중 세 명으로부터 만점을 받지 못한 직원들은 8시간짜리 특수 교육훈련장으로 보내졌다. 여기서 그들은 어떻게 해야 고객에게 더욱 친절해질 수 있는지를 교육받았다. 만일 프로그램을 이수한 후에도 또다시 비슷한 성적을 받으면 다시 재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 프로그램은 직원들에 의해 ‘스마일 학교’로 불렸는데, 스마일 학교에 세 번 이상 입학한 직원은 해고 대상이었다.
세이프웨이의 부사장 라리 렌다(Laree Lenda)는 프로그램과 관련해서 이렇게 말했다. “서비스가 가장 중요하자도 생각한다. 우리의 고객은 존중 받을 필요가 있다. 이것이 우리 서비스의 정의 중 일부분이다.”


알맞은 목표, 의심스런 실행

고객 서비스가 매장 직원들의 필수 조건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어린아이도 알 것이다. 친절함은 당연히 좋은 일이다. 고객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하는데 누가 이의를 제기할 것인가? 하지만, 불행하게도 옳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종종 틀리는 경우가 많다.

세이프웨이 직원들에게 모든 고객을 보고 웃으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미소의 문제가 아니었다. 고객들이 이들의 미소를 유혹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남자 손님과 여직원들 사이에서는 오해의 소지가 충분했다. 당연히 어떤 남자들은 세이프웨이 여직원의 호의를 유혹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미소를 지으며 눈을 맞추는 행동이 성추행의 원인이 된다고 판단한 여직원들은 노조에 고충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또 EECC(고용평등보장위원회, Equal Employment Opportunity Commission)에 직장 내 차별에 대해서도 보고했다. 결과적으로는 회사가 강제로 웃도록 함으로써 적대적 근무 환경이 조성된 셈이니, 정말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

노조의 변호사 매튜 로스(Matthew Ross)는 “음식 점원에게 고객을 존중하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만일 고객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면 소매업체나 식품업계에서 일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직원의 고객 응대에 대한 사리판단력을 뺏어갈 때이다.”라며 세이프웨이를 비판했다.

EECC에 소송했던 세이프웨이 직원 리첼 로버츠(Richelle Roberts)도 동의했다. “우리가 고객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다. 서비스를 강조하는 회사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조건 웃을 것을 규칙으로 정하고 직원들의 고객응대 방법을 획일화하는 것은 회사의 도를 넘어선 방침이었다.”

소송을 건 또 다른 직원 애미 킨온(Amy Kynon)은 “이러한 규칙을 엄격히 적용함으로써, 특히 정체불명 쇼핑객까지 동원한 것은 이상한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려는 우리의 자기 방어 기제를 시험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의무적 미소의 논리

‘우수 서비스 프로그램’은 세이프웨이에 분명 큰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이들은 1990년대에 재정적인 면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미국 ABC방송사 기자 빌 리터(Bill Ritter) 는 세이프웨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친절 서비스는 세이프웨이 사업을 완전히 개선할 것으로 예상했다. 매출과 이익이 엄청 올랐다. 고객의 불평도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모든 것이 좋아 보였다. 성 추행 빼고는 말이다.

비록 우수 서비스 프로그램이 고객을 행복하게 만들고 회사의 재정을 최고의 상태로 올렸지만 직원만족과 고객만족은 반대방향으로 움직였다. 결국, 세이프웨이는 장기 파업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2002년과 2003년에는 적자를 기록하게 되었다.

『고객충성의 신화』, 비즈니스맵, pp.175-179
by sonnet | 2018/05/18 20:19 | 경제 | 트랙백 | 덧글(7)
광복 후 미군정 3년간의 중경임시정부에 대한 당대인의 관점
이 글은 (단독으로 완성을 목적으로 한 글이 아니고) 간단한 의견과 그렇게 생각한 근거를 기재한 메모 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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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정국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순수하게 도의적인 계승은 사실 심각하게 논의되지 않았고 독립적인 주제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때는 중경임시정부와 그 구성원들이 멀쩡히 살아 있었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세력이었기에, 이들이 향후 건설될 민족국가에서 어떤 지위와 권력을 차지하느냐가 첨예한 현실정치문제였기 때문이다. 임시정부의 도통(?)은 현실정치에서 중경임정세력을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를 놓고 동원되는 도구(명분) 중의 하나였다.

중경임시정부를 떠받들어 새 나라의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은 임정봉대론이라고 불리는데, 초기에는 한민당+중경임정계의 논리였고, 국내정치 분화가 진행되고 나서는 이승만과 한민당이 떨어져나가 한독당의 주장이었다가 결국은 실패로 끝났다. 좌파 계열은 처음부터 끝까지 반대했다.

한민당이 중경임시정부 추대운동을 벌인 데 대해서는 일제시기의 행위 때문에 민족한테 내세울 것이 없어 정치적 상징조작으로 중경임시정부를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명이 통설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명분 하나만으로 한민당이 중경임시정부 추대운동을 벌인 것은 아닌 것 같다. 보수적 정치세력인 한민당이 받들어 내세울 수 있는 우익 독립운동세력은 한독당이 주류인 중경임시정부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점 못지 않게 앞서 살펴본 대로 송진우측이 8·15 이전부터 중경임시정부를 추대하려고 했던 데에는 중경임시정부에 대해 과대하게 기대를 하여,[88] “해외 임시정부가 들어와 정권을 집행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 상당히 작용을 하였다. 송진우측은 실제로 중경임시정부가 연합국한테 승인을 받았고, 수만의 독립군을 거느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을 가능성도 초기에는 어느 정도는 있었던 것 같다. 한민당의 중경임시정부 추대의 이유는 9월 8일 나온 한민당 발기인 성명서에 잘 나타나 있다.

오호라 사도여. 군등은 현 대한임시정부의 요인이 기미독립운동 당시의 임시정부의 요인이었으며, 그 후 상해사변, 지나사변, 대동아전쟁 발발 후 중국 국민정부와 미국정부의 지지를 받아 중경, 워싱턴, 싸이판, 오키나와 등지를 전전하여 지금에 이른 사실을 모르느냐. 동 정부가 카이로회담의 3거두로부터 승인되고, 상항 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사실을 군등은 왜 일부러 은폐하려는가.

즉 중경임시정부는 기미운동 당시의 임시정부 법통을 이어받았고 연합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았으며, 중국, 미국, 싸이판, 오키나와 등지에서 독립을 위해 혁혁하게 싸웠기 때문에 중경임시정부를 추대하여야 한다고 중경임정 추대의 이유를 밝혔다. 연합국이 중경임시정부를 승인하였다는 것은 이 이후에도 계속 주장되었는데, 그것은 이승만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 이승만은 귀국한 이틀 후인 10월 18일 한민당 선전부장 함상운에게 “중경임시정부는 이미 중·불 등 연합국으로부터 승인을 받고 미국도 미구에 승인할 것을 언명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하여, 한민당은 즉시 이를 삐라로 만들어 살포하였다. 한민당 등 우익측은 후에 반탁투쟁에서도 그러하였던 것처럼, 중경임정을 환영하는 자는 애국자로, 반대하는 자는 ‘비국민’처럼 선전하였고, 중경임정 추대를 반대한다고 하여 여운형과 건준을 몹시 비난하였다.[92]

[88] (…) 중경임시정부는 스스로를 과대선전하였는데, 그것은 귀국 후에도 나타나, 귀국한 다음날의 기자단 회견에서 엄항섭은 광복군의 실세는 400~600명 밖에 안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총세가 1만이 된다고 말하였다.
[92] 이만규, 앞책, 227쪽. 이만규는 허언과 중상모략으로 중경임정 추대운동을 벌여 우익이 민중을 속였다고 주장하였는데, 당시처럼 정보가 차단된 사회에서는 중경임정에 대한 과대선전은 민중한테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서중석,1991:269-270]


국내에 중경임정의 실체가 잘 알려지지 않아 과장되어 있었고, 거기 편승해야 하는 한민당 같은 국내우익의 사정도 있었던 것이다. 한 편 좌파의 반대논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임시정부 추대에 대한 좌익의 반발 또는 반대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조선공산당은 해방 직후에는, 임시정부의 공헌은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일제의 식민지 철쇄하에서 악전고투하며 구사일생해온 것은 노농대중이고, 이 노농대중이 금일 국가적 독립과 민족적 해방의 주체자가 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국내 혁명세력을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에 두고, 인민공화국이 그것을 이어받았다는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여운형은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중경임정 추대 운동을 반박하였다. 그는 임시정부는 30년 간 해외에서 지리멸렬하게 유야무야 중에 있던 조직이니 국내의 기초가 없어 군림이 불가하다는 점, 연합국한테 승인되지도 될 수도 없다는 점, 미주, 연안 시베리아, 만주 등지의 혁명단체 중에는 임시정부보다 몇 배가 크고 실력 있고 맹활동한 혁명단체가 있으며 그네들 안중에는 임시정부가 없다는 점, 국내에서 투옥되었던 혁명지사가 다수인데, 안전지대에 있었고 객지고생만 한 해외 혁명가 정권만을 환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점, 중경임정을 환영하는 자들은 혁명 공적이 없는 자들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려는 것이고 건준의 정권수립권을 방해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 중경임정만 환영하는 것은 해내해외의 혁명단체의 합동을 방해하고 혁명세력을 분열시키는 과오라는 점 등의 이유를 들어 중경임시정부 추대를 반대하였다. [94]

[94] 자세한 것은 이만규, 앞책 225~227쪽 참조. 해방 직후 여운형은 장덕수에게 “설산, 나도 상해에 있어 보았지만, 임정에 도대체 인물이 있다고 할 수 있겠소. 누구누구하고 지도자를 꼽지만, 모두 노인들뿐이고 밤낮 앉아서 파벌싸움이나 하는 無能無爲한 사람들뿐이요. 임정요인 중 몇 사람은 새 정당이 수립하는 정부에 개별적으로 추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임정의 법통을 인정할 수 없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82.6.11. “비화 미군정 3년”).

[서중석,1991:270-273]


일본이 패전하자 독립국가 건설이 매우 빨리 그리고 쉽게 될 거라는 막연하고 희망적인 기대가 해방 직후 조선인들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분출했다. 후대의 우리가 보면 당연히 무리한 이야기지만, 정서적으로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은 든다.

김구, 김규식, 이시영 등 중경임시정부 요인들이 1차로 11월 23일 귀국하고, 2차로 12월 2일에 홍진, 조성환, 조소앙, 김원봉 등이 귀국하였을 때 한국인들의 중경임시정부 요인에 대한 기대는 컸다. 해방 직후 바로 독립이 될 줄 알았는데, 독립의 실현은 계속 미뤄지고 있었고, 38선의 장벽은 투터워져갔으며, 점차 좌우의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민족의 장래에 불안이 커가고 있었다. 그래서 10월 16일 이승만이 귀국하였을 때 기대를 많이 가졌지만,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민족적 단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이제 중경임시정부 요인들에게 기대를 걸게 되었다. 민족 대단결의 임무가 중경임정 요인들에게 지워진 것이다.

[서중석,1991:275-276]


즉 이승만에게 기대를 걸었고, 또 한 달 후에는 김구에게 기대를 건 것인데 그것도 한 달 정도 지나자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12월은 해방된 해의 마지막 달이었기에, 그리고 해방 이후 불길한 상황이 계속 나타났기 때문에, 민중은 불안 속에서 해가 가기 전에 어떤 돌파구 – 희망이 보이기를 원했다. 이 시기에 정치적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세력은 말할 것도 없이 중경임시정부측이었다. 그런데 중경임시정부측은 인민공화국이 ‘양보’치 않았기 때문이라지만, 12월 하순 모스크바3상회의 결의와 관련되어 신탁통치문제가 보도될 때까지 뚜렷한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지 않았고, 대체로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중경임시정부 요인 귀국 후의 어두운 정치상황을 안재홍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126]

임시정부 귀국 1주일이 지나 벌써 민중은 불안을 품었고, 1개월이 되어서는 초조하였었다. …… 임시정부 내 좌방세력이 포섭되어 있으니만치 좌우협상이 상당히 되려니 하였으나, ‘인공’은 스스로 양보치 않고, 임정은 민족주의진영 총지지의 기세도 있어 법통으로 굳게 지키어 스스로 걸어내려와 타협할 수 없으매, 인공측이 주장하는 양자 동시 해체, 평지 재건식의 논법과는 조합(調合) 될 수 없었다.
[서중석,1991:280-281]


시간이 흐르고...

해방 후 3년 동안 김구가 주축이 된 임정봉대세력은 여러 가지 시도를 했지만 결국 현실정치에서 실패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이 부분은 필요하다면 내용을 좀 보강할 수도 있으나, 꼭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임시정부 세력이 주어진 시간 안에 자신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을 성사시키지 못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앞선 안재홍의 말에서 드러났던 본국 국민들의 꿈과 희망과는 달리, 임정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실력자이자 끝판왕이 아니었던 것이다. 임정귀국세력은 그냥 좀 큰 하나의 우파집단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경 임시정부의 정치적 유산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현실정치세력이 재야에 버티고 있는 것은 새 집권세력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이러한 정치노선에 대한 당시 남북 양 정부의 평가는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남한의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암살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정보장교였던 김창룡 등이 작업한 안두희의 위작 『시역의 고민』에는 암살의 진정한 이유가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1948년 10월의 여순반란 사건, 1949년 5월의 표무원·강태무 대령 월북 사건, 국회 프락치 사건 등 중요한 사건에 모두 김구와 한독당을 연결시켰다. 특히 김구의 남북연석회의 노선을 격렬하게 공격하였고, 여전히 김구가 북한과 연락을 취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한국독립당은 ‘공산당보다 더 미운 당’이요, 김구는 ‘용서할 수 없는 이적행위자’였다.
여기 공공연히 국가를 중상하고 국시를 훼방하며 국책을 반대하고 민심을 선동하는 이적행위자가 있다! 그는 바로 우리의 위대한 영도자이시요, 국부이시요, 애국자이신 김구 선생이시다. 이 이가 김구 선생이시기 때문에 정부 아니 우리의 엄연한 법도 손을 못 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김구가 암살된 다음 날 이승만 대통령은 이러한 백범관을 묵인하는 묘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김구씨를 살해한 동기에 관하여서도 공표하고 싶은데, 그것은 발표할 때가 되면 반드시 공표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때 모든 사실을 일반인 앞에 공개해 놓는다는 것은, 나의 생각으로는 그 생애를 조국독립에 바친 한국의 한 애국자에 대한 추억에 불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도진순,1997:343-344]



참고자료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이승만·김구 시대의 정치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by sonnet | 2018/05/13 19:31 | 정치 | 트랙백 | 덧글(8)
시대착오적 질문 (Bernard W. Anderson)
모세 시대의 종교는 유일신 신앙이었을까? 그 시대의 종교는 하나님 외에는 다른 어떤 신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 신앙이었을까?

아마도 이러한 질문은 우리가 다신교(polytheism)나 유일신교(monotheism), 단일신교(henotheism)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고대 이스라엘의 신앙을 이해하려고 던지는 다소 시대착오적인 질문일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신들의 존재에 관한 추상적 문제에 대해 답을 찾으려 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들었던 것은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이었다. 그 계명은 “다른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명령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완전하고 절대적인 헌신을 요구하였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소유권은 하나님의 “질투”라는 표현에서 잘 나타난다.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라(출34:14)
절대적 충성에 대한 요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다른 신들을 섬기라는 유혹을 받게 될 때, 비로소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출 34:11~16 참조)

- Bernard W. Anderson, 『구약성서 탐구』, p.177


by sonnet | 2018/05/13 18:04 | 한마디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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